서양 미술사 - 고대

고왕국 시대(Old Kingdom Era) 이집트 미술

셀린늘 2022. 6. 2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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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 시대를 지나 역사 시대로 진행되면서 인간의 삶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착 생활을 시작하며 불어난 인구는 식량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식량 확보를 위해 새로운 형태를 갖춘 조직된 사회를 출현하게 하였다. 변화는 이집트에서부터 시작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인더스 계곡, 중국 황하 지역에 이르기까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집트 문명은 고대 문명 중에서도 엄격하고 보수적이라고 평한다. 이집트의 사회 제도와 종교 그리고 예술적 사상은 오랜 역사의 초기에 수립되었고 이것은 이집트 문명이 끝나고 사라질 때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미술은 보수적이었을 지라도 결코 정체되어 있지 않았으며 오히려 혁신과 변화의 모습도 보인다. 또한 이집트 미술의 업적은 그리스와 로마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고왕국 시대*

 

이집트의 역사는 기원전 3천 년 즈음 성립된 고대 이집트의 제1왕조부터 시작하여 수많은 '왕조'들로 나누어볼 수 있다. 제1왕조가 성립될 무렵의 과도기 시대는 '왕조전 시대'라 부르며 그 이후 고왕국 시대는 기원전 2155년에 멸망한 제6왕조까지로 구분한다. 왕권은 곧 권력자이자 신이었던 '파라오'의 권위를 드러내며 이에 대한 믿음의 표출은 이집트 문명의 특징이자 이집트 미술의 독특한 특성이다.

 

고왕국 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아스완에서 델타 지방을 아우르는 나일 계곡을 정비하였고 동시에 효율적으로 통치되는 단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나일강에 제방과 운하를 건설하며 강물을 통제하여 비옥한 토지를 가꾸었다. 아쉽게도 이 시대에 행해졌던 토목 공사의 흔적이나 세워진 도시와 궁전들은 현재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대신에 분묘와 부장품을 통해 고왕국 시대를 추측할 수가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 그 시대의 이집트인들이 의도한 것이기도 하다.

 

이집트인들에게 죽음이란 새로운 삶을 위한 중간 과정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이 사후에도 행복한 삶을 누리기를 바라고 기원하였다. 또한 자신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며 사후에 영혼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무덤 속을 꾸몄고 다양한 부장품을 넣어 두었다. 이 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죽은 뒤에도 영혼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쾌락을 즐길 것이라고 믿었다. 미리 이러한 쾌락을 준비해 둔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미지의 두려운 존재(죽음)에 시달리는 대신 활력적이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르메르 왕의 승전 기념판> (=나르메르의 팔레트) 

 

나르메르 왕은 이집트 미술에서 이름이 확인된 가장 최초의 인물이다. 이 기념판에는 이집트 미술의 보편적인 특징들이 이미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기념판은 전달을 목표로 한 상징적인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기념판 앞면에서 나르메르 왕은 쓰러진 적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돌도끼로 내리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상단의 매 한 마리는 승리감에 가득 찬 호루스 신을 상징한다. 여기서 나르메르 왕과 호루스는 동일시 되어 적을 무찌르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적들은 무력한 모습으로 바닥에 쓰러져있다. 나르메르 왕의 발을 보면 샌들을 벗고 있는데, 그 샌들은 뒤에 있는 신하가 들고 있다. 이는 그가 성스러운 땅에 서 있음을 상징한다. 기념판에서 비춰지는 물체들의 모습은 한 방향에서 바라본 것 같으나 자세히 보면 두 가지 방향 즉, 정면과 측면에서 관찰한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다. 이는 이집트 미술에서 2,500년 동안 일관성 있게 적용된 공식과도 같다. 나르메르 왕의 묘사에 이런 공식이 적용된 이유는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형상의 파라오와 신성한 의미를 지닌 사람들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평범한 인간들은 꿈틀거리거나 뒤틀린 모습으로 묘사될 때에, 파라오는 얼어붙은 듯이 가만히 머물러 있는 상태로 묘사하여 그의 신성한 품격을 나타내었다. 

 

나르메르 왕의 승전 기념판_Palette of Narmer_MIT Libraries

히에라콘폴리스에서 출토_기원전 3000년경_점판암_높이 63.5cm_이집트 박물관_카이로  

 

 

<티의 분묘 - 하마 사냥을 지켜보는 티 벽화>

 

<나르메르 왕의 승전 기념판>에 등장하는 양식은 고왕국 시대에 축조된 평민들의 무덤에도 적용되기 시작하였다. 하마를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한 벽화는 당시의 사카라 지방의 건축 감독관이었던 티(Ti)의 분묘에서 발견된 것이다. 부조 형식으로 제작된 이 벽화의 배경에는 파피루스 덤불이 묘사되어있다. 그 속에 둥지를 튼 새들은 침입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 그리고 지그재그 모양으로 그려진 강물에는 몸부림치는 하마들과 물고기들이 가득하다. 오른쪽 배에는 사냥꾼들이 타고 있으며 하마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 배에 서 있는 티(Ti) 혼자만이 마치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처럼 부동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가 취하고 있는 이런 자세는 같은 시대의 장례용 초상 조각이나 부조 양식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또한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훨씬 크게 그려져 있는데, 이런 수동적으로 멈춰있는 자세는 고왕국 시대에 비슷한 주제로 그려진 모든 그림에서 죽은 자를 그리는 일반적인 표현 방식이었다. 이런 묘사를 통해 고대 이집트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가 있다. 그들은 비록 육체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 있어서 여전히 현세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벽화들은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의 일상을 지켜보듯 계절의 흐름이 순환하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하마 사냥을 지켜보는 티_chosun.com

티의 분묘에서 출토_기원전 2400년경_석회암 부조에 채색 _이집트_사카라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 

 

인간의 신체를 육면체의 형태로 파악하려는 시도는 이 조각상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이 입체적인 형상은 위엄과 불멸성이 느껴질 정도이며 살아있는 영혼이 깃들어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매우 강한 분위기를 발산하고 있다.

 

두 명의 인물을 나타낸 조각상은 모두 한 발을 앞으로 내딛고 있으나 걸어갈 것 같은 느낌은 주지 않는다. 지금은 확인할 수 없지만 이 조각상을 완성했을 때에는 선명한 색상으로 채색되었을 것이다. 이집트 미술의 일반적인 관례로 볼 때에 왕의 조각상은 왕비의 조각상보다 더 검게 채색되며, 눈동자 또한 물감으로 칠하여 살아있는 모습으로 보이게끔 하였다. 

 

미세리누스 왕과 왕비_King Menkaura (Mycerinus) and queen_Wikidata

기자에서 출토_기원전 2599~2571년_점판암_높이 138.4cm_파인 아트 미술관_보스턴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이집트의 벽화는 죽음과 그 이후의 삶에 대한 이집트인들의 생각과 태도를 반영하지만, 모든 이집트인들의 것이 아니라 왕족과 귀족들에 한정되었다. 이러한 벽화가 주로 파라오와 그의 친척들의 분묘에서 발견된다는 것을 볼 때에 특권계층들의 관념은 확인할 수 있으나 일반 평민들의 죽음의 대한 태도는 알 수가 없다. 왕들의 분묘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피라미드의 형태로 세워져 있는데, 분묘의 기본 형태는 외벽을 돌로 처리한 '마스타바(mastaba)'라고 불리는 사각형의 축조물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 내부에는 여러 개의 방들과 그것들을 잇는 통로가 설치되어있다.

 

왕들의 마스타바는 계단 피라미드 형식으로 발전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것은 조세르(Zoser 또는 Djoser) 왕의 분묘이다. 마스타바를 쌓아 올린 듯한 형태는 나중에 축조된 경사면을 매끈하게 처리한 방식과 대조된다. 피라미드는 종교 행사를 치렀던 사원과 기타 부속 건물과 함께 거대하고 광대한 묘지의 일부분을 이루었다. 그중에서 조세르 왕의 계단 피라미드가 속해 있는 묘지 구역이 가장 정교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묘지를 포함해서 아직까지 남아있는 많은 축조물을 건설했던 임호테프(Imhotep)는 이집트 역사에 기록된 가장 최초의 미술가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업적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조세르 왕의 계단_The Step Pyramid Complex of Djoser_Ministry of Tourism and Antiquities-Egypt

임호테프_조세르 왕의 계단_피라미드_제3왕조_기원전 26000년경_이집트_사카라 

 

 기자(Giza) 지역에 축조된 '세 개의 피라미드'는 피라미드 건축의 발전의 절정을 보여주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모양의 피라미드 형태이다. 이 피라미드는 섬세하게 처리된 돌로 감싸져 있었으나 케프렌(Chefren) 왕의 피라미드 꼭대기 부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세개의 피라미드_The pyramids at Giza_Wikipedia

미세리누스 왕(기원전 2470년경)_케프렌 왕(기원전 2500년경)_케오프스 왕(기원전 2530년경)의 피라미드_이집트_기자

  

케프렌 왕의 피라미드의 부속 건축물로 세워진 계곡의 사원 옆에는 스핑크스가 서 있다. 사자의 몸통과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이는 케프렌 왕의 얼굴을 본떠 조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얼굴의 형상이 이슬람 지배기에 훼손되어 알아보기가 힘들다. 

 

기자의 스핑크스_Sphinx_klm.com

  스핑크스_기원전 3500년경_높이 19.8m_이집트_기자 

  

 

이러한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들은 파라오의 권력과 지위를 대변한다. 파라오의 권력은 제4왕조 말부터 점차 작아지며 이후 시기에서는 작은 크기의 피라미드들이 주로 만들어졌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경탄의 대상인 대규모의 피라미드들과 그 주변 건축물들은 그 거대한 규모만큼 논란도 많았다. 특히 건축사업에 대해 두 가지 관점의 의견으로 대립되는데, 대규모 공사를 위해 혹사당한 노예들의 노동력 착취의 상징이라는 측면과 정당한 대가를 제공하여 진행된 공공사업으로서 당시의 이집트 백성들의 경제적 안정을 위한 수단의 결과로 보는 관점도 있다. 

 

 

 

 

 

*출처_서양미술사_H.W. 잰슨 & A.F. 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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